그라노베터의 [배태의 문제]

그라노베터의 "배태의 문제(The Problem of Embeddedness)"

마크 그라노베터(Mark Granovetter)는 폴래니(Polanyi, 1957)에 의해서 처음으로 사용된 배태(embedded)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인간의 경제행위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신고전경제학과 구별되는 시각을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경제적 행위는 신고전경제학자들이 생각하듯이 합리적이고 원자화된 개인들의 이익추구 과정으로만 설명될 수 없으며 행위는 항상 현재 개인이 맺고 있는 사회관계 혹은 인간관계의 연결망(network)에 배태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라노베터가 배태 개념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논문의 내용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Granovetter, Mark. 1985. "Economic Action and Social Structure: The Problem of Embeddedness,"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vol.91, no.3, pp.481-510.

1. 머리말 : 배태의 문제

배태의 논지는 분석하고자 하는 행위와 제도가 현존하는 사회관계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경제적 행위의 배태성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비시장 사회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다루고자 함이 아니라 다만 배태라는 개념을 이론적으로 정교화한 다음, 그 개념의 가치를 근대사회에 뿌리를 둔 한 문제를 가지고 예시하고자 한다. 그 문제란, 근대 자본제 사회에서 어떤 거래가 시장에서 행해지고 어떤 거래가 위계적으로 조직된 기업 내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2. 사회학과 경제학에 보이는 인간 행위에 대한 과잉사회화된 개념과 과소사회화된 개념

과소사회화된 견해와 과잉사회화된 견해는 서로 분명히 대비됨에도 불구하고 원자화된 행위자에 의해 수행되는 행위와 의사결정을 상정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과소사회화된 설명에서, 원자화는 공리주의적인 자기 이익을 추구한 결과로 나타난다. 과잉사회화된 설명에서, 원자화는 행동유형이 내면화됨에 따라 현존하는 사회관계가 행위에 주변적인 영향밖에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처럼 질서의 문제에 대한 과소사회화된 해법과 과잉사회화된 해법은 행위자들을 현재의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원자화시킨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인간의 행위를 풍부하게 분석하려면 과잉사회화 및 과소사회화된 개념화라는 극단적 이론들에 함축되어 있는 원자화를 피해야 한다. 행위자가 사회적 맥락밖에 있는 원자처럼 행동하거나 의사결정을 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들은 우연히 차지하게 된, 특정한 방식으로 교차된 사회적 범주들이 써주는 대본에 맹목적으로 집착하지도 않는다. 합목적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오히려 구체적인, 현존하는 사회관계 체계 내에 배태되어 있다. 필자는 이 논문의 나머지에서 배태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경제행위에 대한 이론적 경험적 연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를 예시해 보이겠다. 먼저 초점을 좁혀 경제생활에서 신뢰와 부정의 문제를 다루고, 그 다음에 '시장과 위계' 문제를 다룸으로써 이 문제를 분석할 때 배태라는 관념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예시하고자 한다.

3. 경제생활에서의 배태, 신뢰, 부정

윌리엄슨은 현실적인 경제적 행위자는 자기 이익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기회주의'에도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하였다. 기회주의란 교활한 자기 이익 추구이다. 속임수에 숙달된 행위자는 거래이익을 실현한다. 이처럼 경제인은 자기이익을 추구한다는 보통의 가정이 보여주는 것보다 좀더 교활하고 사악하다. 이것은 매일 매일의 경제생활이 어떻게 불신과 부정에 의해 얼룩지지 않을 수 있는가 라는 고전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필자는 경제학 문헌에서 이 문제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인 답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인간행위에 대한 과소사회화된 개념과 연계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과잉사회화된 개념과 연계되어 있다. 전자는 부정의 문제를 회피하며(기회주의의 문제를 제도적 문제로 돌려버림), 후자는 일반화된 도덕성에 기대고 있다. 전자는 계약 속에 내포되어 있는 구체적인 인간관계와 의무가 제도적 구조와는 달리 부정을 어느 정도 방지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후자는 제안된 현상에만 가능한 설명으로 신뢰의 근원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

반면에 배태 주장은 신뢰를 발생시키고 부정을 방지하는 데에서 구체적인 인적관계와 그러한 관계의 구조(또는 연결망)가 갖는 역할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신용이 있다고 알려진 사람과 거래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일반화된 도덕성이나 제도적 구조에 의존하고자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실제로 우리는 더 나은 정보가 없을 때에는 일반화된 정보에 만족하지만 보통은 좀더 나은 정보를 추구한다. 어떤 사람이 믿을 만하다고 알려져 있다는 말보다는 그 사람과 직접거래를 해왔고 그가 신뢰할 만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정보 제공자로부터 얻은 정보가 더 낫다. 더욱 좋은 것은 과거에 그 사람과 직접 거래했던 경험으로부터 얻은 정보이다. 이것이 보다 나은 정보인 이유는 ① 이 정보에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② 사람은 자신이 얻은 정보를 가장 신뢰한다. ③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거래가 중단되지 않도록 신뢰를 보여야 하는 경제적 동기가 있다 ④ 순수한 경제적 동기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경제적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강한 기대 및 기회주의에 대한 자제를 함축하는 사회적 내용을 담고 있다(예: Prisoner's Dilemma, 불이 난 극장과 불이 난 집의 예).

경제생활에서의 신뢰와 질서의 문제에 대한 배태접근은 사회관계의 구체적 유형을 추적하고 분석함으로써, 일반화된 도덕성을 강조하는 과잉사회화된 접근과 제도적인 구조를 강조하는 과소사회화된 접근의 중도를 취한다. 그 어떤 대안이나 홉스적인 입장과는 달리 이 입장은 보편적 질서나 무질서에 대해 포괄적인 예측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부적인 사회구조에 따라 어떤 현상이 발견될지를 알 수 있다고 가정한다.

4. 시장과 위계구조의 문제

경제생활에 대한 배태 접근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예로서 필자는 월리암슨이 [시장과 위계] 및 이후의 논문들에서 제시한 영향력 있는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월리암슨은 경제생활이 어떤 조건 하에서 위계적 기업의 영역 안에서는 수행되고 이 영역을 넘는 시장과정에서 수행되지 않는가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신제도경제학이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내용과 일관되게, 어떤 상황에서 발견되는 조직형태는 경제적 거래비용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이었다. 결과가 불확실하고 자주 반복되며 상당한 정도의 거래특정적 투자가 필요한 거래들은 위계적으로 조직된 기업 내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크며, 반대로 확실하고 반복적이지 않고 거래특정적인 투자가 필요하지 않은 거래들은 기업 간에, 즉 시장 영역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전자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위계구조안에 내부화된다. 첫째, 제한적 합리성 때문이다. 즉 경제적 행위자가 복잡한 상황조건을 적절히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거래가 내부화되면, 그러한 상황조건들을 예측할 필요가 없어진다. 두 번째 이유는 기회주의, 즉 경제행위자가 교활함과 속임수까지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이익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기회주의 때문이다. 기회주의는 권위관계, 그리고 거래 상대자와의 강한 일체감에 의해 완화되거나 제약된다. 이러한 일체감은 거래 당사자들이 시장 영역의 틈새 사이에서 맞닥뜨릴 때보다 한 회사 내에서 몸담고 있을 때 갖게 된다.

이러한 분석은 홉스적인 분석을 재발견한 것에 불과하다. [리바이어던]에서처럼 과소, 과잉사회화된 가정들을 혼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홉스가 과잉사회화된 주권국가를 강조하는 것처럼 기업내의 위계적 권력의 효율성을 과잉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은 홉스의 자연상태와 흡사하다. 완전경쟁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는 규율을 빼버린 점만 제외한다면 그것은 고전적 정치경제학의 원자화된 익명적 시장과 같다. 즉 그것은 과소사회화된 개념화로서, 경제 생활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서 서로 다른 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사회관계가 기여하는 역할을 무시하는 개념화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들 주위에는 사업관계가 사회관계와 서로 얽혀 있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널려 있다. 크든 작든 많은 기업들은 상호연계된 임원진에 의해 연결되어 있고, 기업 임원들의 관계는 다양하고 밀접하게 얽혀 있다. 특히 기업 엘리트 사이에는 사업관계가 사교에까지 연장되어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것은 기업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업간 연계는 상층부 사람들의 인간관계 연결망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거래가 이루어지는 모든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많은 산업에서 널리 채택되고 있는 하청 역시 기업들 간에 지속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이 때의 기업간 관계는 그 기업들이 한 회사 단위 내로 흡수되어 위계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안정적이고 지속적이며 그 관계가 가끔씩만 경쟁입찰을 통해 맺어지는 준통합적인 관계를 맺으며 준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을 낳는다. 이것은 순수한 시장 거래나 공식적인 수직적 통합보다 선호되는 양식이다.

이런 현상은 부분적으로는 투자라는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즉 지속되는 연합을 통해 양 당사자는 함께 일하는 것을 배운다는, 다소 특이한 투자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일상적인 작업에 수반되는 사회적 상호작용으로부터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개개인들의 욕구와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경제생활의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경제적인 거래로 시작한 것에 사회적 관계를 덧씌우는 것은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경제생황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서 기업간의 사회적 관계는 시장과 위계라는 생각이 상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며 기업내의 권위는 덜 중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여기서 제시한 관점은, 시장 위계구조 문제에 대한 앞으로의 연구는 인간관계의 실제적 유형에 세심하고 체계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